동기화를 위한 허구적 고향: 인터페이스의 버그들
* 본문은 팩션에서 개최된 상희 개인전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나원영
하지만 내가 변한 것에 비하면
다시 가본 그곳은 변한 것이 아닌걸1
그러니까,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갑니다2: ‘벌레들은 노스탤지어에서 비동기화 되고야 말았다.3 당신이 시간과 현실, 그리고 고향에서 마침내 풀려난 만큼.’ 이다음, GM은 PL의 PC가 P市에서 맞은 최후를 묘사하지요. (GM은 게임진행자를, PL은 게임참가자를 의미합니다. PC는 게임참가자의 캐릭터이며, P市는 게임이 진행되는 소도시고요).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당신의 귀에는 기계장치가 작동하는 소리랄 게 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모름지기 게임이라면, 내장 회로를 바삐 움직여 입력을 변환하고 신호를 계산한 뒤 명령을 전달해 결과를 출력해야 할 텐데? 혼란스러워하는 당신에겐 이제, 최후의 판정만이 남았습니다. 마른 땀이 찬 당신의 주먹 안에서 빙빙 돕니다. 매끄러운 표면끼리 비벼지는 두 주사위의 무게가 새삼스레 실감이 나네요. 그래도, 재굴림이 가능하다는 걸 잊지 마세요.
가까스로 판정에 성공한 당신에겐 설명을 들을 마지막 기회가 주어지고, 그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간다: 2024년 6월,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전시장 팩션에서 상희와 성훈으로 이뤄진 교각들이 디자이너 김지연과의 협업으로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라는 전시를 진행했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서늘하고 침침한 지하로 내려가 둘러보자니, 흰 벽에는 나무 합판들이 덧대졌고 합판에는 다시 흰 종이들이 덧붙었다. 계단 건너편 벽에는 그렇게 거대한 지도가 한 장 붙어 있었고, 이 지도 벽 가까이에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온전한 입장을 위해서는, 지도 벽 왼편의 안내판을 차례로 거치고 캐릭터 시트를 규칙에 따라 꼼꼼히 작성하는 것이 먼저 필요했다. 이 과정을 마치면 작가에게는 GM의 역할이, 관객에게는 PL의 역할이 부여됐다. 그보다는, PC를 맡은 PL을 맡은 관객의 역할이 부여됐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 어쩌면, 당신 위로는 더 많은 역할이 겹쳐 있을지도 모른다.
무안하게도, 나는 여태껏 테이블톱은커녕 RPG를 완수한 적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는 사람이다. 아니면 내가 역할 놀이 중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게 익숙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고. 그럼에도 나는 허구와 현실, 인공적으로 지어낸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 사이의 중첩이 게임과 놀이에서 어떻게 섞여 드는지에 관심이 있다. 기본적으로는, 인공적인 허구들의 전반적인 작동법을 말이죠. 평소와 같다면 이러한 허구는 내가 랩톱에서 플레이하는 일반적인 비디오 게임의 형태로, 즉 양편의 상호작용을 호환하는 매체를 따라 명확히 분리된 채로 나타났을 터였다. 이에 비해 TRPG의 형식을 빌린 대화형 게임인 〈노스탤지어의 벌레들〉과 전시장 한쪽 벽면에 마련된 대형 지도인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로 주요하게 구성된 전시는, 말하자면 허구와 현실이 서로에게 겹친 현장이었다. 특히나, 두 작품의 총합이라 할 만한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는 P市라는 허구를 팩션이라는 전시장이라는 현실에 끄집어내 양편을 동기화했다는 점을 당신에게 이야기할 만하다고 느껴졌다. 그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갈 것 같다:
두 작품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와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은 일견 전시장의 규범에 맞춰 분리되어 있는 듯 보인다. 전자는 현실상의 물질적인 재료인 “합판 구조물에 부착한 롤지, 스티커, 가변 설치”로 환원될 수 있지만, 후자는 규칙서에 실린 “대화형 게임”이라는 비물질적인 양식으로 작동하는 허구다. 그럼에도, 선뜻 현실과 허구로 갈라칠 수 있을 만한 양쪽 작품은 GM(작가)과 PL(관객)의 플레이로 연동되어 하나의 기관을 형성한다. 다만, 그 중첩의 초점을 어디에 어떻게 두는지에 따라, 현실과 허구가 맞닿는 지면이 달라진다. 먼저, 현실에서 허구로 향하는 접경지에는 ‘대화형 지도’가 놓여 있다. 전시장의 두 구석을 빙 두르는 이 지도를 묘사하자면, 점점이 흩뿌려진 알갱이들이 기초적인 외곽선 전반을 이루고, 게임이 진행될수록 타원 속의 사람 윤곽과 긴 화살표부터 3×3으로 모인 크고 작은 원들과 네 꼭짓점이 뻗은 불빛 모양까지 다양한 형태의 스티커가 그 위에 덧붙여진다. 즉, 이 지도는 PC가 탐사하는 허구적인 P市를 상징하지만, 그렇다고 P市의 현실적인 지리를 정확한 축척과 투영과 범례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지도에 기대하는 현실 모사 기능이 축소되거나 아예 결여된 이 자리에는, 그러므로 대화를 통한 조우가 그리고 조우를 통한 허구가 흘러들어올 수 있다. 도리어, 전시가 진행될수록 이 대화형 지도에 누적되는 것은 스티커라는 현실상의 몸체를 지닌 한편 게임 내 특정한 정보 값이라는 허구를 내장한 기호들이다. 처음에는 정확히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낯설었던 기호들은 당신이 게임을 진행하며 허구를 헤쳐 나갈수록 빠르게 친숙해진다. 그러니 일단, 계속해서 진행해 보도록 합시다.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을 플레이하는 도중 발생한 조우에 맞춰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에 특정한 스티커를 붙여가는 행위는 스티커의 기호를 매개로 현실과 허구를 교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양한 규칙과 텍스트로 이뤄진 이 허구는 GM과 PL 또 작가와 관객 간의 대화로 구현되고, 각 조우에서 합의된 결과는 이를 추상화하는 기호로 번역되며, 그리고 이 기호는 지도에 덧붙일 수 있는 스티커로 옮겨져 기록된다. 이렇게 도착한 현실에서 다시 지도로, 스티커로, 기호로, 정보로, 마침내 허구로, 역방향을 타고 돌아가는 교환 과정의 부단한 되먹임이 게임을 작동시킨다. 굳이 이 모든 단계를 일일이 열거하는 게 구차하듯이, 지도상에서 발생하는 허구와 현실 간의 동기화는 관객이 의식도 하지 못할 새 빠르게 벌어진다. 마치 키보드의 자판과 마우스의 버튼을 누르는 등의 입력이 컴퓨터 내부의 체계를 거쳐 매끄러운 속도로 스크린과 스피커에 출력되는 것처럼. 그렇게 따져보자면 GM이자 작가가 스티커를 붙이고, PL이자 관객이 이를 해독하는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는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이 구동되는 하드웨어의 일부인 셈이다. 여기서 지도라는 접촉면은 일종의 인터페이스로 기능해,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가 전시된 현실과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에 구현된 허구를 효과적으로 동기화한다. 탐사 중 새로이 열린 공간은 그에 합당한 기호로 존재하게 되며, 죽어버린 NPC와 흰개미에게는 부재를 의미하는 가위표가 붙여진다. 이런 식으로, 각 PC가 세션마다 남긴 정보가 여러 스티커의 꼴로 이 지도에 차곡차곡 붙여질수록, 이동 경로나 새로 열린 통로를 비롯해 각종 조우와 NPC 관련 정보, 전임자가 남긴 전언까지가 한 장의 지도에 종합적인 데이터로 누적되기까지 한다. 기호들의 해독 능력을 터득한 관객은 지도를 자세히 읽는 것을 통해 허구에 접속할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제 나름의 통계를 산출해 P市의 더욱 자세한 정보를 유추하고 이 세계에 대한 전능감을 어느 정도 느끼게 된다. 곧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는 허구와 현실 간의 인터페이스이면서도, P市의 풍부한 모의를 도와주는 보철이 되어주는 셈이다.
이렇게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가 하드웨어를 구성하는 인터페이스로서 기호를 통해 현실을 허구에 가깝게 동기화한다면, 전시장의 두 GM(작가) 각각을 통해 구동되는 게임인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은 일종의 소프트웨어로서 스스로를 구성하는 규칙을 통해 허구를 현실 쪽으로 동기화한다. 바로 여기서 일반적인 컴퓨터 게임이나 어쩌면 탁자에서 진행되는 롤플레잉 게임과 사뭇 다른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만의 특징이 두드러지는데, 이를 위해서는 미안하지만 잠깐 다른 얘기를 해야겠다.
자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간다: 하드웨어의 전기신호와 그 명령어가 언어 체계로 일약 도약하며 소프트웨어로 가장됨에 따라, 게임은 수량화된 사이버네틱스로 포획됐다.4 물론, 수량화라고 해도 게임은 컴퓨터로 가동되고 비디오로 매개되기 이전의 놀이였을 때부터도 어느 정도는 산수와 규칙으로 이뤄졌겠지만. 때로는 서로 룰을 숙지하고 있다는 믿음에 따라 머리를 굴려 가능한 전술의 가짓수를 세어보고, 때로는 진행자가 규칙서의 세부를 뒤적거리고 주사위 굴림의 셈을 끄적거리며 서로를 중재하는 식으로. 이때, 기계장치는 인간 두뇌로 감당 못 할 만큼 엄격한 규칙과 복잡해진 산수를 대리하는 계산기의 역할을 도맡았다. 그리고 지난 한 세기 동안, 컴퓨터의 증가하는 처리능력에 비례해 이 규칙과 산수의 규모와 밀도는 급격하게 불어났으며 그만큼 기계장치와 인간 사이의 언어를 매개하는 번역 체계들이 그 사이로 두껍게 끼워 넣어졌다. 바로 여기서, 현실과 허구 사이의 어긋남이 발생했을 것이다. 웬디 희경 전은 「소프트웨어, 혹은 시각적 지식의 지속에 대하여」에서 소프트웨어의 발명으로 하드웨어 쪽에 일어나는 두 가지의 은폐 대상을 밝혔다.5 하나는 기계들의 언어로, 논리회로를 흘러 다니는 전기신호 자체가 추상화와 기호화를 거쳐 인간들이 알아먹을 수 있게 번역되는 과정에서 컴퓨터의 신경계가 아닌 기계 속의 유령에 가까워졌다. 다른 하나는 여성들의 노동으로, 기계와 인간을 중개하는 전술을 직조했던 놀라운 기예는 편리하고 안락한 자동 제어 체계로 대리되며 양편의 매개가 아닌 체계 속의 유령에 가까워졌다.
기계장치와 그 전문통역가가 은폐된 컴퓨터는 인터페이스로의 접속과 소프트웨어의 표면적인 활용 외엔 평범한 사용자가 심원한 작동법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 미지의 사물이 되었다. 그러니 정보기술의 이 두려울 정도로 불필요한 가속을 누구든 제정신으로 따라잡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컴퓨터의 역량이 어느새 게임을 추월한 만큼 게임의 역량은 어느 순간 그 사용자를 추월했으며, 심지어는 게임과 사용자 모두가 컴퓨터에 잡아먹혀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컴퓨터 게임 속 허구는 그 사양이 부푸는 속도에 따라 안팎으로 과다하게 팽창하다 못해, 온 지구가 축척 따위 필요 없이 일대일로 복사되고 실제 우주만큼 텅 빈 진공으로 채워진 세계가 대량 생산되는 지경에 닿았다. 사용자에게 행위성이나 전능감이 너무 과다하거나 너무 공허하게 주어지는 이들 세계는 시력보다 높은 해상도의 화면으로 중계되고 지구상의 금융 위기보다도 극심하게 급등하는 경제로 작동했다. 게임의 사용자인 우리가 결국 고도로 발달한 이 기계장치의 처리능력에 합당한 상상력을, 이 능력 있는 기계의 처리장치와 대등하게 겨룰 만한 산수와 규칙을 짜낼 힘을 갖추지 못한 것일까. 어찌 되었든, 게임을 작동시키는 기계장치에 내장된 물질적인 역량과 게임 자체의 산수 및 규칙에 잠재된 비물질적인 역량 간에 어긋남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산수와 규칙이 그리 복잡하지 않아 연산을 기계장치에 대리할 필요가 없는 게임으로는 과연 무엇이 가용해질까? 이제 슬슬 전시로 다시 돌아가자면,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갈 것이다: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이라는 소프트웨어가 구동되는 하드웨어 전반은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라는 전시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다. 전시장 내부에 설치된 지도가 인터페이스 역할을 한다면, 이 소프트웨어가 실제로 알맞게 작동해 허구를 생산하도록 하는 장치란 다름 아니라 작가들이다. 이는 물론 전시 안에서 GM의 역할을 맡은 작가들이 규칙서를 참조하고, PL의 역할을 맡은 관객과 대화를 나누며 말 그대로 게임 자체를 진행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계적인 실행이기도 하겠지만 상호작용적인 퍼포먼스이기도 한 이 작업에는 규칙서의 낭독만이 있는 게 아니니까. GM(작가)은 이 게임을 훨씬 실감이 나게 구동하기 위해 지도라는 인터페이스에 스티커로 된 기호를 입출력할 뿐만 아니라, 주사위 판정을 계산하고 지도에 강조를 위해 조명을 비추고 각 상황에 맞춰 BGM을 선곡하고 때로는 NPC를 실감이 나게 연기하는 등 수많은 작업을 실행한다. 현대적인 컴퓨터에서라면 은폐되었을 산수 및 규칙의 연산 과정이 이렇게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에서 분명하게 노출되는 셈이다. 하나의 무대로 기능하는 전시장이라는 샌드박스, 무대 안팎으로 노출된 무대장치로 기능하는 GM(작가)이라는 하드웨어와 무대의 중계기로 기능하는 지도라는 인터페이스로 현실과 허구를 부단히 동기화하는 작동이 효과적으로 가시화된다. 다시 말해, 기꺼이 접속할 만한 허구를 생산하는 언어와 이를 운영하는 노동이 편리하게 자동화된 소프트웨어로 가려지지 않고 도리어 현실에 끄집어내진 셈이다. 그 덕에 관객은 PL의 층위에서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이라는 게임이 돌아가는 과정을, 대화와 행동을 통해 허구가 현실에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과정을 실제로 관람하고 물론 이에 참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참여를 따라가면, PL이었던 관객은 어느새 PC로서도 P市라는 허구에 수월하게 접속해 있다. 연산을 대리할 컴퓨터도 행위성을 대리할 아바타도 없이 말이다.
다만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가 이렇게 허구와 현실을 효율적으로 동기화하며 정말로 은폐하는 것이 있다면, 전시와 작품이 게임의 형식으로 허구와 현실을 겹칠 때마다 양편의 경계를 어느 정도 뭉뚱그리고 흩뜨려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조금만 비약을 해보자면,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갈 테다: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은 전시장에 입장한 관객이 입구 계단 근처 나무 합판에 붙은 전시 서문과 게임의 프롤로그 등을 구경하면서부터, 혹은 GM(작가) 앞에 앉아 캐릭터 시트를 작성한 뒤 대화의 말문이 열리면서 시작되지 않는다. 게임을 구동하는 ‘대화’란 이미 그 이전부터 ‘당신’을 향해 작동되고 있다. 전시 예약을 위한 구글 독스 링크를 열면, 예비 관객은 기본적인 인적 사항 이외에도 몇 가지의 모호한 질문들에 답을 적어야 한다. 집과 개미 그리고 고향에 어울리는 단어를, “모두에게 돌아갈 집이 있다”라는 문구와 로르샤흐 테스트 이미지에 대한 반응을, 그리고 ‘당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묘하게 자가당착적인 “아래의 질문부터는 당신의 대답이 퍼포먼스의 진행에 반영될 예정입니다. 반드시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대답할 필요는 없습니다.”라는 문구에서, 아무리 자기 자신을 기준 삼지 않더라도 여하튼 ‘당신’이 내릴 수밖에 없는 이 답변은 과연 어떻게 게임 속에 반영되는 것일까? 작가(GM)의 부단한 작동에서 관객(PL)은 과연 이를 눈치챌 수 있을까?
비슷하게도, 〈노스탤지어의 벌레들〉를 플레이하는 중 주사위 판정의 재굴림 기회를 얻으려면 고향에 관련된 질문들에 하나씩 답변해야 한다. 이 질문들이 이상적인 집의 풍경을 그리라 하고, 고향을 생각할 때 느끼는 감정과 당신이 고향을 떠날 때 두고 온 것이 무엇인지를, 그러니까 “당신에게 돌아갈 곳이 있습니까?”라고 물을 때에도, ‘당신’은 과연 누구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너머에서 ‘당신’을 부르는 존재는 현실과 허구 또 그 사이의 여러 겹 중에서 과연 어디에 위치한 것일까? 물론 게임의 규칙상으로는 P市라는 허구의 복판을 탐사하는 PC의 입장에서 답변하는 게 정설이겠고 전시의 관습상으로는 현실상의 작가와 관객 관계를 상정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는 이미 현실과 허구가 서로에게 알맞게 겹친 현장에서 지칭이 모호한 ‘당신’에게 의미가 모호한 질문들을 제시하면서 양편의 뒤섞임을 그 참여자에게 조준한다. 게임에 참여하기 이전부터 전시의 관객이 될 준비를 하는 ‘당신’에게는 이 질문들을 통해 PL과 어쩌면 PC의 역할이 겹겹으로 덧씌워지고, 게임에 참여하는 동안에의 질문은 허구에서 현실까지 덧씌워진 모든 겹을 뚫고 복수의 ‘당신’들을 향한다. 심지어는 좀도둑과 생물학자, 그리고 전직 소방관처럼 이미 조형된 인물을 PC로 선택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관객인 당신이 PL로서 쥐고 있는 캐릭터 시트지, 각종 인적 사항과 재굴림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적어야 하며 사지와 소지품 그리고 상태 이상이 스티커의 기호로 표기된 이 한 장의 종이 또한, 거대한 P市의 전도만큼 하나의 지도, 허구와 현실이 맞닿는 인터페이스가 아닌가?
허구에서 현실로, 또 현실에서 허구로 쌓이는 모든 겹을 뚫고 ‘당신’에게 질문하며,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은 관객이라는 위상이 느슨해지는 틈을 타 참여자를 PL로, 더 나아가 PC로 조금씩 물들인다. 그러니까, 전시와 게임을 위한 BGM을 제공한 기나이직이 합성된 전자음의 고유한 음색을 활용해 게임 내 조우마다 필요한 구체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샌드박스로 기능하는 전시장에서 그 음악을 재생하는 순간 음향적인 허구로 모의한 분위기가 일정한 진동수로 공기를 떨며 현실에 덧씌워지는 것처럼. 그 BGM들을 길게 연결한 DJ 셋에서 특정 음역대가 과다하게 증폭하고 각 BGM의 사운드끼리 격하게 충돌하는 동안 PC이자 PL이자 관객이 남긴 마지막 한마디가 TTS로 발화되는 채 뒤죽박죽된 허구를 유령처럼 떠도는 것처럼.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의 PC가 이야기상에서 P市에 발을 들여놓기 이전부터 흰개미들이 이주하고 잠식한 고향에 돌아가려는 모종의 운명적인 욕망에 붙들려 있듯, 현실상의 관객 또한 전시장에 발을 들여놓기 이전부터 P市를 황망하게 떠도는 PC의 허구로 낚아채진다. 상실된 고향과 그에 대한 향수를 주제로 하는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의 이야기 자체가 흥미로운 것 또한,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라는 전시가 허구와 현실을 동기화하는 것처럼 이 허구 자체에서도 다양한 유형의 동기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아마 이런 식으로도 갈 것 같은데, 게임 속 PC의 ‘고향’은 여러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의 P市는 이미 흰개미들이 점령한 상태로 인간이 거주하던 시기의 기능을 상실했고, 무엇보다도 PC가 경험했던 과거의 P市가 정확히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구체적인 지도나 공식적인 설명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즉, 온전한 고향으로서의 P市는 게임 속의 이야기에서뿐만 아니라 게임을 이루는 규칙의 층위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PC 앞에 놓인 P市라는 현실 앞에서, ‘고향’은 PC의 기억에서만 상기되는 하나의 허구로 자리매김할 수밖에는 없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게임의 규칙서에는 참조할 만한 P市의 원형이 부재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PC는 상실해 버린 고향을 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떠올리며 향수를 느껴야만 하는 것일까? 절박함에 고개를 치켜든 PC는 머리 위에 캐릭터 시트라는 지도를 드리운 PL을, 그리고 그보다도 한 겹 위에서 고향에 대한 상념을 끄적이는 관객을, 그러고는 바로 당신을 바라보네요. 양방향으로 이뤄지는 동기화는, 이제 허구에서 현실을 공략하기 시작합니다. PC에게 없었던 고향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군요. 당신의 주사위는 여기서 잘 먹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에서 P市는 기이하기 그지없는 흰개미들과 진작에 동기화된 현장으로, 이 벌레들은 게임이 작동하는 동안 PC의 현실 감각을 다양한 층위에서 파고들며 일종의 감염을 일으킨다. 이 감염은 물론 허구적인 PC에게만 유효하지 않으며, PC를 모의하는 PL, 그리고 그 PL의 역할을 맡은 관객의 생각과 감정을 타고 현실을 향해 전파된다. 게임 속의 크고 작은 조우는 바뀌어버린 P市라는 현실에 남은 채 잃어버린 고향이라는 허구를 떠도는 여러 사람을 제시한다. 개성 있는 NPC인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충분히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과의 대화를 통해 PC이자 PL이자 관객인 당신은 여러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종종 재굴림 기회를 위한 질문에서와 같이 고향에 대한 숙고도 요청된다. 그러나 최소한 규칙서 상에서는 명확하게 추억할 만한 고향 자체가 부재하기에, 허구의 복판에 놓인 PC는 게임 내외의 여러 유용한 매개 장치를 타고 현실로 올라가 PL과 결국 관객에게 의지하며, 기어이 P市에 대한 기억이라는 정보와 그에 대한 향수라는 감정을 뽑아낸다.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에서 벌어지는 정보와 감정 간의 신속한 동기화는 P市와 지도 그리고 전시장 사이에서만큼 PC와 PL 그리고 관객 사이에서도 쉽사리 알아채지 못한 새 이뤄진다. 이 덕에 허구는 현실과의 경계가 애매해지고 ‘당신’이라는 지칭 대상이 모호해지며 관객과 PL과 PC의 위상 또한 느슨해졌을 때를 노린다. PC는 관객이자 PL의 선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신의 존재를 역이용해 PL을 타고 관객을 감염시키고, 전시장의 관객이 현실에서 고향에 갖고 있는 기억과 심상 그리고 감정은 이제 P市와 PC가 위치한 허구로 끄집어내진다. PC는 이제 현실의 관객에게서 추출해 허구로 이송해 온 고향의 기억과 향수의 감정을 실감 나게 느끼며 P市를 헤쳐 나가기 시작한다.
게임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PC는 P市의 새로운 거주자가 된 흰개미들과 멀쩡했던 과거가 존재한 적 없었던 걸지도 모를 이 도시에 서서히 감염되어 가는 듯하다. 실제인지 환상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지는 흰개미들과의 직간접적인 조우가 반복되며 PC는 점차 P市에 물들어간다. ‘당신’은 현관문 너머로 요리 냄새와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유혹과, 어두컴컴한 구멍에서 ‘당신’을 직접 그 ‘집’으로 불러들이려는 초대를 가까스로 지납니다. 꿈 혹은 환각 속에서 ‘당신’ 옆에 누운 여왕개미는 주위를 어느새 ‘집’으로 바꿔버리고, 자그마한 흰개미들이 ‘당신’의 몸을 파고들어 그들만의 안락한 ‘집’으로 삼아버리지요. 단단한 현실에 위치한 줄로만 알았던 당신은 점차 허구가 기거하는 물컹한 집에 가까워진다. 처음에는 나름 ‘현실적인’ 목표로 탐사에 임했던 PC는 어느새 P市와 흰개미들에 점지된 운명인 듯 이끌리고 휘말려 들어가며, 게임 속 마지막 조우인 ‘최후의 집’에 다가갈수록 존재한 적도 없었으며 허구인 줄로만 알았던 고향에 차차 동기화된다: “당신은 당신을 위해 지어진 집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한참 전부터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허구가 P市와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을 넘어 전시장이라는 현실을 향해 또 이곳에 기꺼이 접속되려는 관객을 향해, 무엇보다도 당신을 향해 동기화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을까? 당신은 이미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라는 인터페이스를 통해 성공적으로 P市에 접속했고, 허구의 정보와 기억과 감정을 현실의 머릿속에 기록했으며, 작가와의 대화를 하드웨어 삼고 구동되고 산수와 규칙으로 이뤄진 소프트웨어와 동기화했다. P市를 전시장에 펼쳐놓은 지도만큼이나, PC가 캐릭터 시트뿐만 아니라 머릿속에도 펼쳐진 당신, 관객이자 PL이자 PC이고 PC이자 PL이며 관객인 당신이야말로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를 작동시키는 또 다른 인터페이스 장치, 현실과 허구가 서로에게 겹치고 덧씌워지고 뒤섞이는 접촉면이다. 당신 또한 현실과 허구를 갉아먹고 그 안팎에서 공생하며 거주하는 흰개미와 같은 벌레, 인터페이스에 끼어든 버그다. 자 이제, 마지막 대화에 대한 당신의 반응을 판정해 볼 때입니다.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상태 이상을 겪고 착란이나 공포 등이 늘어날 수도 있지만, 별다른 문제 사항 없이 넘어갈 수도 있어요. 이야기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갈 것이겠죠. 90분 간의 세션을 재미나게 마친 당신은 PC를 떠나보내고, PL의 역할에서도 벗어나며, 다시 관객이 되어 전시장을 둘러봅니다. 계단을 타고 올라 전시장을 빠져나가 지상으로 올라오면 그마저도 아니게 되지요. 그렇지만 P市에 잠시 방문한 경험은, 허구와 조우를 하고 그리로 접속하는 다른 모든 경우가 그렇듯 당신이라는 인터페이스에 조금이라도 흔적을 남길 것이며, 그 정보는 어느새 현실로 동기화될 것이다. 전시와 게임, 그리고 고향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당신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고 결정합니다.
1) 3호선 버터플라이의 2012년 트랙 “다시 가보니 흔적도 없네”를 인용했다.
2)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간다”는 문장은 닉 랜드의 글 「멜트다운」의 첫 문장을 참조했다.
3) 커트 보니것의 작품 『제5 도살장』의 2절 첫 문장을 참조했다.
4) 〈웹진 한국 연구〉에 실린 강덕구·김내훈의 번역문을 참조해 「멜트다운」의 첫 문장을 변형했다. (https://www.webzineriks.or.kr/post/meltdown---nick-land---%EA%B9%80%EB%82%B4%ED%9B%88-%EA%B0%95%EB%8D%95%EA%B5%AC-%EC%98%AE%EA%B8%B0%EA%B3%A0-%EC%86%8C%EA%B0%9C)
5) ‘아마도 독자’의 블로그 〈Interfacing〉에 실린 번역문을 참조했다. (https://interfacing.tistory.com/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