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네트워크의 금융화, 예술 노동의 우버화





글. 윤태균



1.

 아래의 세 단락은 미술계의 구성과 할당된 역할에 관한 본원적 믿음을 기초로 한다.


2.

 생물의 기관(organ)들은 각자에게 할당된 역할을 수행한다. 마찬가지로 미술계의 관리자들, 예술가들, 애호가들, 유통망들과 같은 기관은 제도적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려 애쓴다. (그러나 이 구조는 각 구성원들이 자신에게 수행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믿음으로 지속된다.) 통상 미술계는 이 기관들의 총합으로 여겨지곤 하는데, 사실 기관들의 총합은 미술계보다 작은 단위이다. 미술계는 모호한 단위로서 하나의 개체로 정의되지 않는 희뿌연 덩어리이다. 따라서 미술계는 그 바깥과의 명확한 경계를 갖지 않는다. 미술계에서의 내부 작용은 얽힌 모든 것을 내재면으로 포섭하여 발생한다. 말하자면, 개체가 뿌리내린 토양과 환경(대기, 지리, 기후…)까지가 미술계의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것이다. 어떤 계(world)의 지형도를 그릴 때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개체의 기관 구성이 아닌 생태의 구성이다.


3.

 기관(organ)은 조직(tissue)들로 구성된다. 동질의 세포 집합인 조직은 공동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그렇기에 우리가 관리자들, 애호가들, 예술가들, 유통망이라는 기관을 고려하기 전 미술계 구성 분석의 기본 단위로 여겨야 할 단위가 조직이다. 콜렉티브, 단체와 같은 명시된 집합 뿐만 아니라 개인적 네트워크와 암묵적 집단까지도 조직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생물학에서의 설명과 같이 각 조직의 기능은 상이하다. 미술계의 지형을 거시적으로 그리기 위한 가장 기초 단위라고 여길 수 있기에 생략할 수 없는 설명이다. 비평은 이 조직들이 구성하는 기관의 역할을 언어로 명명하고 설명한다. 통용되는 학문적 언어로 생물의 조직, 기관, 개체 그리고 환경과 조건의 관계를 연결하고 서술하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다.


4.

 위의 비유 체계에서 비평가의 역할은 생물학자에 가깝다. 기관과 조직의 경계를 나누고 명명하여 그것들의 관계성을 서술한다. 접붙혀진 두 유기체를 하나의 개체로 간주하는 것도, 두 개의 개체로 간주하는 것도 비평가의 몫이다. 비평가가 생물학자라면 비평가는 생태계 바깥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최근의 신유물론적 사유들을 빌자면, 학자는 관조자의 위치에 있지 않다. 오히려 수행하는 관찰자의 입장인데, 생태의 다른 구성물들과 동등하게 수행적이다. 당착한 인류세에서, 우리는 생물학자(관찰자)가 정립한 체계로 세계를 변형한다.


5.

 그러나 미술계는 (앞서 설명한 역할과 기능에 대한 믿음과 같은) 생태 시스템의 유기적 군집에 비유하여 설명하기 보다는, 금융 시스템의 작동에 기대어 설명하기에 더 손쉬워지고 있다. 2008년 이후 판본의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시민 개인을 기업으로 여긴다. 그러나 금융화의 결과는 기업 가치의 상승이 아닌 투기였다. 개인은 피투자자로 거듭났고 자신을 향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신용도를 관리한다. 국가 재정에 의존하는 한국 예술계는 국가가 관리하는 거대한 시장으로, 각각에게 투자 유치를 위한 포트폴리오 쌓기를 요구한다. 공공 기금의 수여와 아트 마켓의 초대는 개인의 가치보다는 주주의 이익을 기준으로 실행된다. 미술계의 조직과 개인은 피투자자로 거듭나는데, 이는 기업가적 유토피아보다는 실체 없는 화폐들의 네트워크-거버넌스를 형성한다. 자신의 노동 수익을 또 다른 프로젝트에 지출하는 것은 자사주 매입의 행태와도 같다. 이 포스트임노동 시스템에서 형성되는 개인의 주체성은 예전의 예술가적 자아가 아니라 화폐 유희의 철저한 투기로 결정된다. 최근 미술계의 유행하는 키워드인 포스트휴먼, 기후 위기, 신유물론, 사변적 실재론, 가속주의, 신체성... 이 키워드들은 어떻게 시스템 내에서 ‘중요한' 담론으로 거듭났는가? 신자유주의의 기업가적 주체에게 요구되는 인적 네트워크와 시장 이해도가 이 결정 과정을 정당화한다. 미술계의 상징 자본 네트워크와 금융화된 시스템 안에서, 자기 피드백과 그로 인해 생성된 전시-이미지의 응집은 양으로 결정된 ‘좋은’ 미술과 동종 선호로 인해 어떤 미술이 ‘중요한’ 미술인지 설정한다. (이 현상은 해시태그로 뭉쳐 웅성거리는 특정 미술 전시들 이미지와 텍스트들을 미술계의 통용되는 규범으로 부상시켰다. 인스타그램 팔로우-팔로워 네트워크, 프로젝트의 노출도와 참석의 경제. 이 다층적 투자자-피투자자의 금융 네트워크에서 과연 누가 무엇이 중요한 미술 현장인지를 결정하는가? 단연코 비평적 주체는 아닐 것이다.) 금융 네트워크는 자율적으로 각 주들(담론과 개별 예술인)의 가치를 실기간으로 결정해 나간다. 이 시스템 내에서의 투자는 이러한 차익으로 어떤 문화-예술적 상징 자본, 말하자면 미술계 내에서의 영향력과 참석의 경제 통화를 추출해내는지가 관건이다. 예컨대 투자된 공공 기금은 피투자자의 임금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글로벌 예술 네트워크에서 유효한 상징 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는 정량적 결과(비엔날레와 서울옥션의 주가, 아트페어의 성과)를 요구한다. 또한 각종 공모전과 지원 사업은 ‘동시대성'이라는 키워드 뒤에서 주류를 선별한다. 그리고 투자받는 예술 노동자들에게 ‘투자자’로서의 정당한 권리, 즉 시스템에서 통용되는 담론 키워드에 대한 활성화와 국가 문화예술 상징자본의 생산을 요구한다. 물론 이 키워드에 속하는 담론들은 관리자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과 플랫폼 자체가 결정한다. 예술인은 노동자에서 피투자자가 되었다.


6.

 국가의 재정, 그리고 문화가 가지는 상징자본이 각기 다른 통화의 화폐라면, 한국의 예술가들에게 투자되는 기금들은 상호 환전을 기초로 한 환투기에 가깝다.


7.

 시스템의 ‘외부자’로 취급되는 임시직 (혹은 프리랜서) 노동자들은 보장되지 않는 일거리만을 전전하고 노조의 조합주의와 종신직 일자리가 마련한 안전 지대들에도 속할 수 없다. 자본의 운용자들은 이 제도를 외부자에 대한 지원과 침식되고 있는 시스템 내부자들을 위한 보호 장치를 한데 묶어 정당화한다. 이 공모와 지원 프로그램들은 공정성을 위한 기준들로 더 나은 시스템을 위한 기획들로 포장된다. 현재 담론들이 가지는 중요도와 언급양의 격차는 통용되는 ‘비평적’ 트렌드를 기준으로 승자와 패자의 격차 또한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내부자들 뿐만 아니라 프리랜서로 ‘우버화’된 예술 노동자들 또한 이러한 담론 체인에 속하는데, 문제는 시스템이 이들을 같은 류의 경제 활동 노동자들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분명 그들이 받은 대우와 투자받는 재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들은 같은 (금융화된) 미술 플랫폼에 위치하지만 다른 류의 노동 활동을 수행한다. 임노동과 포스트 임노동을 동질화하는 현재의 시스템은 노동자들을 계속해서 소규모 피투자자로 내몬다.


8.

 우리는 경제학적 벡터를 기반으로 미술계의 다이어그램을 다시 그려야 할 것이다.


9.

 비평은 실재적 사건들을 역사화하려는 시도이다. 그렇기에 현재의 미술계 시스템-플랫폼에서는 비평 행위의 주체는 부재한다. 비평 행위는 전위대가 아니라 인스턴트 담론의 투기가 이루어진 폐허의 현장을 다듬기만 하는 척후병의 역할을 수행한다. 흔히들 비평의 폐허를 말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비평이 시스템 내에서 주체성을 가질 수 있는 수행적 역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술에서 다뤄지는 담론들은 실재적 사건, 구체적인 정치성과 얼마나 연합하는가? 담론 텍스트는 플랫폼과 이미지 체계에서 유통되는 화폐일 뿐 실재와 달라붙어있기는 한건가? (NFT는 그것이 지시하는 이미지-물질과 실재적, 정치적 연합이 가능할까?)


10.

 전통적인 관리자로서의 비평가상을 회복하거나 예술인 개개인이 고유한 주체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아니다. 미술계의 심화되는 금융화가 야기하는 문제들-그러니까 국외의 담론이 수입되며 정치지리학적 맥락의 탈각이 발생하는 현상과 예술인들에게 피투자자로서의 기업가적 주체가 되기를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플랫폼-이후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수행적 영역을 다시금 점하여 담론의 대항 투기를 행하는 정치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