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없는 반성 : 한국 현대 시의 반성에 대한 물음



김유수(시인)


1. 진술과 진실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황병승, 「커밍아웃」




 시적 진술은 설득과 관련된다. 물론 설득의 대상은 독자요 설득의 주체는 작가일 것이다. 시가 궁극적으로 시인의 의사 표명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면1, 시에서 진술이 등장하는 순간은 작가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요한 타이밍이다. 따라서 독자는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진술 속 작가를 꼭 붙잡아두어야 할 것이다.

1 오규원, 『현대시작법』




 한편 시적 진술이 작가의 언술을 통해 필터링(해석)된 관념을 독자에게 설득한다면, 이미지(묘사)는 관념이 독자와 직접적으로 관련되게 하는 것이다2. 이미지가 표상하는 ‘그것’을 작가의 언술은 붙잡아두지 못하고 작가의 존재감은 이미지가 표상하는 그것에 의해 희미해지고 모호해진다. 따라서 이미지가 등장하는 순간 독자는 느슨해진 작품과 작가의 이음새에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이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영민한 독자라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이미지를 꼭 붙잡아두어야 할 것이다.

2 이승훈, 『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




 이런 대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시에서 포착 가능한 진실의 두 가지 다른 양상이다. 이미지(묘사)가 진실과 통하는 경우, 진실은 사실과 겹침으로써 드러난다. 반면에 진술이 진실과 통하는 경우, 진실은 사실과 관련을 맺지 않고 드러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시적 진술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시적 주체의 일관성·진정성에 관한 관심을 완전히 접을 수는 없겠다. 그리고 우리가 시적 주체의 일관성·진정성에 관한 관심을 기울일 때면, 진실은 진리치(객관적 진실에 대한 신뢰)로부터 멀어져 시적 주체의 내면을 형성하는 소실점(주관적 진실에 대한 확인)으로 수렴하기에 이른다.




 가령, 자신의 시가 내면의 반영에 그치기를 원하지 않는 어느 시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가 내면의 소실점(일관성·진정성)을 자의적으로 파괴한다고 치자. 그래도 그의 진술은 ‘분열된 자아의 초상’을 그려낸다는 일말의 진실이 눈치 빠른 독자에게 알려지고 말 것이다. 독자가 작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작품으로부터 어떠한 의미도 식별해낼 수 없다.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차이를 알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수많은 문학 작품들을 읽을 필요가 없어진다.




 결국 시적 진술이란 작가와 독자의 상호의존적 관계의 강화일 뿐 아니라, 하나의 ‘작품’을 성립시키는 공모 관계의 활성화이다. 이 공모 관계를 통해서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작가의 주관적 진실을 얼마간 공유한다. 무슨 뜻이냐. 진술이 품고 있는 놀라운 비밀은, 진술이 항상 설득에 성공한다는 것이다. 설득력의 여부나 미학적 성취와는 상관없이 진술은 항상 일말의 주관적 진실을 독자에게 전이시키는 작가의 연금술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실의 전이’를 다른 말로 정의하면 진실의 ‘폭로’가 된다. 작가는 진술함으로써 자신의 진실을 주장할 뿐 아니라, 독자의 진실을 일방적으로 폭로할 수 있다.




 함께 예제를 풀어보면서 그러한 ‘폭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탐색해보자. 황병승의 「커밍아웃」을 함께 읽어보자. 노골적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주관적 진실을 고백하는 형식에 대해서, 즉 진술의 진실성에 대해서 노래한다.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시의 첫 문장부터 화자는 내면이라는 소실점을 형성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는 진술이라는 형식에 대한 자의식을, 얼굴과 뒤통수의 위상 전환을 통해서 드러내는 듯하다. 2행까지만 읽어도 우리는 시적 주체의 자기 인식이 나의 주관적 진실보다도 타자의 주관적 진실을 우선시함으로써 달성됨을 알 수 있다. 나의 뒤통수가 ‘진짜’인 이유는 내가 뒤통수를 통해서만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 아니다. 너의 진실이 나의 뒤통수를 향해서만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을 수용한 결과로 뒤바뀌는 것은 얼굴/뒤통수가 표상하는 진실의 척도다.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그러나 2행까지 읽으면 언뜻 수동적이고 수용적이었던 화자의 태도는 이어지는 3~5행에서 위악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타자에 대한 수용은 자기파괴의 인과로써 작동하고, 나의 과격한 행위는 뒤에서만 진실을 말하는(나의 앞에서는 진실에 관해 침묵하는) 너에 대한 일말의 분노 혹은 원망 같은 정념을 공격적으로 응축한다.




“나의 또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시의 2연까지 읽으면 다음과 같이 의심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너의 주관적 진실에 대한 나의 수용은 너 또한 나의 주관적 진실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기 위한 일종의 구실인 건 아닐까? 나는 타자의 관점(뒤통수)을 수용하는 듯하더니, 다시 자신의 관점(항문)으로 진실의 척도를 바꾸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연에 행해진 내면의 폐기란 사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인 셈이다. 내면을 폐기함으로써 나는 또다른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더 많은 ‘입’들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얼굴을 갈아버렸기 때문에 다른 얼굴들을 가질 수 있으며 입술을 뜯어버렸기에 다른 입술들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너는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 내 앞에서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어서 더 많은 진실을 가질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요구한다. 네가 감춰버린 손을 내밀어보라고, 너의 진짜 손을 내밀어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는 네가 내민 그 손이 가짜 손에 불과하다는 나의 주장이기도 하다. 사실 지금 나는 너에게 요구(설득)하는 척하면서 나의 주관적 진실(“너의 진짜 손은 따로 있다!”는 확신)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나의 진실이 너의 진실을 압도한다. 심지어 나는 내면을 폐기함으로써 더 많은 진실을 소유하게 되었음에도 너에게는 네가 폐기한 내면을 복구하라는 모순된 요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한쪽으로 유리하게, 일방적으로 작동하는 아이러니의 동력은 다름 아닌 시적 진술의 사용에 있다.




 한 편의 글이 독자의 인식에 대한 ‘규제’라는 점을 고려하면, 황병승의 시적 주체가 취하는 이러한 ‘강제성’은 무엇보다 독자의 자기 인식에 대한 강제성이다. 즉 황병승은 스스로 내면의 폐기(미적 모더니즘의 자아)를 성취하고자 하지만, 자신의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는 내면(서정시적 자아)에 집중하라고 요구한다. 이와 같은 미학적 자유 내지는 위반이 가능했던 것은 ‘진술이라는 언술 형식의 강제성’을 황병승이 영민하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진술은 강제적이고, 그래서 유용하다. 진술은 작가의 자의적인 구분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척도가 되게끔 하는 유용한 도구다. 무언가를 진술할 능력과 권리 덕분에 작가는 무엇이든 진실로 둔갑시키는 연금술을 부릴 수 있었으며, 반대로 독자에게 부족했던 것은 딱 하나, 진술할 능력과 권리였다.




 이쯤에서 다시 시의 처음으로 돌아가 질문을 던져본다. ‘당신’은 왜 ‘나’의 뒤에서만 진실해진 걸까? 아니, 우리는 이렇게까지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당신’은 ‘나’의 뒤에서조차 진실을 말한 적은 있는 걸까? 우리는 ‘당신’이 ‘나’의 뒤에서 진실을 말했다는 그 진술을 어떻게, 왜 믿게 되었는가?




 주체의 진술이 어떤 진실성을 강제할 수 있는 조건은 객관적 진실의 척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작가의 진술에 의존해 전체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독자에게 작가란 곧 전체인 셈이다. 따라서 시의 제목은 ‘커밍아웃’이지만, 이것은 일종의 ‘아웃팅’이 되기도 한다. 시적 주체의 고백이 곧 독자의 진실이 됨으로써, 독자의 진실을 작가가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황병승의 시적 주체는 서정적 자아의 권능으로부터 과연 얼마나 멀어졌을까? 아니, 우리가 시적 진술의 매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면 서정적 자아의 권능으로부터 과연 얼마나 멀어질 수 있겠는가? 어쩌면 우리가 시적 언술의 한 토대로서의 진술을, 그리고 진실을 담보하는 말의 형식으로서의 진술을 다시금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애써 발견한 미적 ‘차이’들을 구태여 무효화시킬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화자는] 겉으로는 꽃을 뿌리며 기쁜 척하지만 속으로는 가지 말라고 호소한다. 그러므로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는 말 역시 겉으로는 눈물 흘리지 않겠지만 속으로는 눈물 흘린다는 의미. 이런 심리적 이중성을 흔히 심리적 양가성이라고 부르고, 이런 양가성이 아이러니와 통하고 이런 표현은 이른바 언어적 아이러니에 속한다. 이런 아이러니의 특성은 말의 표면과 심층이 대립한다는 것. 그러나 이 대립은 서로 반대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두 항목을 동시에 인식하는 태도이고 이런 태도가 현대적인 인식과 통한다.”

이승훈, 같은 책




김소월의「진달래꽃」이 드러내는 화자의 위악성으로부터 황병승의「커밍아웃」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황병승의 「커밍아웃」이 드러내는 미적 현대성과 비교해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얼마나 뒤떨어진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여기의 시에 관해서 말하자면 ‘무리해서라도’ 둘의 거리를 좁혀놓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리가 여전히 여기에 서서 당신을 꽃길로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 시사에서 서정시적 자아와 미적 모더니티의 자아는 한 번도 제대로 결별한 적이 없는 것만 같다.







2. 전체와 작가




“꽃은 없고 꽃잎들이 무수히 날린다”

이수명, 『붉은 담장의 커브』




 그러니까 시원하게 퉁쳐서 말해보자. 우리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3 나는 에두아르 르베의 「자살」 속 유명한 한 줄이 ‘근대문학’의 담론을 수립해온 한국의 현대 시가 편애해왔던 ‘나’와 ‘너’의 관계를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는 내가 원할 때 나에게 말하는 한 권의 책이다. 너의 죽음은 너의 삶을 썼다.” 여기서 ‘나’와 ‘너’라는 기호는 서로의 위치를 언제든 뒤바꿀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와 독자가 수시로 너와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러한 회로를 제작한 것은 분명 독자가 아니라 작가였다. 작가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으나, 그의 죽음 덕분에 가능해진 삶을 독자가 살아간다. 작가와 더불어 사는 삶을 독자가 살아간다.


3 saivite, 「시간이 많다면」
(https://blog.naver.com/bastardrider/223329568684)




 ‘책’이라는 은유조차 배제하고 관념적으로 이를 요약하자면, 독자에게 작가란 곧 전체인 셈이다. 이 말의 뜻을 이장욱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시의 발신자와 수신자는 ‘전체로서의 인간’을 전제로 만난다.” 그러면서 그는 작가와 독자의 의사소통이 ‘응답의 무한한 지연’을 전제로 한 소통이기 때문에 “시는 한껏 ‘무책임’해도 좋다”고 덧붙인다.4 이장욱은 문학이 커뮤니케이션과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생각을 차단함으로써 문학을 현실로부터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문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물음을 교묘하게 피해 가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미적 자율성’과 ‘문학의 참여’라는 한국 문학의 해묵은 논쟁을 반복하는 대신, 이를 절묘하게 빠져나간 듯하다. 하지만 미적 현대성과 서정시적 자아의 모호한 결합 속에서는, 그 수많은 시적 주체들의 극복 불가능한 상실감의 ‘보편적’ 대상으로 사회 혹은 현실이 호출되는 상황은 도무지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결국 이장욱은 ‘순수 문학’이라는 이념의 은밀한 옹호자로 축출될 것이다.




4 이장욱, 「유령 시인」(『나의 우울한 모던보이』)




 이러한 사정 속에서 ‘나의 우울한 모던보이’라는 이장욱의 평론집 제목은 한국 현대 시사에 대한 아주 적절한 통찰이자 요약처럼 보인다. 그래서 (항상 ‘동시대’의 시적 주체들에 대한 옹호자인) 이수명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국 현대 시사를 짊어진 채로 이렇게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왜 우울하면 안 되는가? 우리의 우울이 곧 각자의 자유일 수는 없는가?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 생길 때 비로소 슬픔은 완성된다.

한 고통에 묶여 다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수명, 「슬픔」




 이수명은 「슬픔」이라는 시에서 ‘슬픔의 완성’이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라고 진술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절대적 고통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상대적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다. 그리고 상대적 고통에서 오는 상대적 자유란 ‘개인성’을 옹호하고 보호한 뒤에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개인성’의 오래된 옹호자로서 이수명은 ‘위로’라는 말의 형식 속에서도 연대 같은 것이 아니라 일찌감치 ‘고독’할 자유와 타인의 ‘상실’을 발견해냈다. 그가 (그리고 한국의 현대 시사가) 만성적으로 느끼는 이 고독과 상실을 명료하게 상징화한 문장이 『붉은 담장의 커브』의 자서(自序), “꽃은 없고/ 꽃잎들이 무수히 날린다”일 것이다.




 무수히 날리는 꽃잎들에게 꽃이란 상실된 전체이다. 전체의 상실로 인해 고독이 드러나고, 고독의 드러남으로 인해 전체의 부재가 환기된다. 이때 부재하는 ‘꽃’의 이미지는 ‘전체로서의 작가’와 ‘전체로서의 한국 문학’을 동시에 표상할 수 있겠다. (물론 이수명은 어떠한 상징도 거절하겠지만 말이다.) 이와 같은 상징적 꽃의 부재·상실로부터 우리가 또 질문해볼 수 있는 지점은, 우리가 세계 문학 내지는 서양의 문학 이론으로부터 ‘작가의 죽음’이란 관점을 수입해 옴과 동시에 전체로서의 한국 문학은 상실된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작가의 죽음은 한국 문학 내부의 사건이 아니라, 한국 문학을 불가능하게 만든 외부적 원인, 그니까 존재론적으로 보자면 ‘비(非)사건’이요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무의식적 외상’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체로서의 작가와 전체로서의 한국 문학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작가의 죽음’ 자체를 취소해버려야 하는 건 아닐까? 역사란 시간의 ‘의식’에 해당할 터인데, 애초에 역사적 사건도 아니었던 무의식적 외상이 역사의 큰 기둥인 듯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호기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작가의 죽음을 배제한 한국 문학사를 써보면 어떨까? 개별 작품들로부터 생생히 살아있는 전체로서의 작가를, ‘축출’할 것이 아니라 ‘추출’해보면 어떨까? 우리가 작가는 곧 전체임을 계속 의식한다는 전제 속에서만 ‘한국 문학’이라는 전체가 처음으로 활성화될 수 있겠다.







3. 방목과 반목




“양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화자가 다 알 것 같다는 생각 속에서

내가 잘 지냈다”

윤재성, 「만년의 작업」




 미적 현대성의 자아를 한국 현대 시에 수입해 온 일등 공신 중 한 명인 이승훈 시인은, 한국의 시인들이 너무 공부를 안 한다(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언제까지 서정시나 쓸 거냐!)고 투덜댔다지만, 내가 보기에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우리 시대의 시인들은 너무 똑똑하다. 공부를 참 많이 한다. 가령, 여기 ‘만년의 작업’으로 등단(데뷔)한 시인의 경우가 있다. 시인 윤재성은 이 「만년의 작업」이라는 등단작에서 자기가 쓴 시의 제목을 남의 작품을 대하듯 논평하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 시인이 ‘만년의 작업’을 통해서 데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넘어서, ‘만년의 작업’에 대한 논평(메타-진술)을 통해서 데뷔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있다.




 황병승이 진술의 ‘강제성’을 영민하게 간파하고 사용할 줄 알았던 시인이라면, 그가 불명예스럽게 퇴장한 이후의 시인들은 그 강제성을 드러내기보다 ‘은폐’함으로써 진술의 힘을 강화하는 방법을 깨우쳤다. 진술의 강제성을 은폐하는 동시에 강화하기에 더없이 좋은 방식은 진술의 ‘메타성’을 영민하게 간파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이에 가장 능숙한 시인 중 하나가 황인찬이다. 진술의 메타성이 강화될수록 시인은 저 바깥의 초연한 관찰자, 서술자의 위치로 이동하며, 그 자리에는 현실을 초월하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러니까 전체로서의 작가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으나, 자신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사실적인’ 자세의 죽은 척을 해내고 있던 것이다. 황인찬의 데뷔작인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이 그렇고, 그의 근간인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에 실린 수많은 시들까지도 그렇다.




“새들이 전선 위에 줄지어 앉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새들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래도 새들은 이곳을 내려다보고 하늘은 점점 어둡다




그리고 폭우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져 내린다




아이가 집에 들어온 것은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일이다




성철아, 손부터 씻어라 비가 오기 전에 들어와서 참 다행이야 하느님이 도우신 거야




바깥의 것들이 물에 휩쓸려 가는 동안, 엄마는 말한다”

황인찬, 「두희는 알고 있다」





 인용한 시에서 두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두희가 알고 있다’는 정보만은 확실히 전달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두희라는 인물은 시에 등장하지 않으며, 정작 이 시를 읽고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해봤자 “새들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은 사실이 아니라는 확인 정도일 것이다.) 그런 사정 속에서 화자는 서술상의 정보를 교묘히 제약하고 조절함으로써, 자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와 아우라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적어도 화자는 두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를 알고 있다는 뜻은 두희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이 약삭빠른 화자는 진술할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절제하는 듯하지만, 사실 절제한 적이 없다. 도리어 자신의 능력과 권력을 능숙하게,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는 자신이 ‘응당 사실인 것과 ‘사실 아닌 것’을 세심히 살피고 있는 듯 건조한 어조를 강조하며 말하지만, 반대로 그는 사실과 사실 아닌 것의 척도를 최소한으로 뭉뚱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두희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과연 사실인가? 그건 화자는 물론이고 두희조차 알 수 없는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두희는 알고 있다’고 (심지어 제목으로) 못을 박아버린다. 그런데 그 확신을 채우는 시의 내용은 독자의 어떤 확신도 거부하려는 듯이 전개된다. 시의 결말에 이르러 그는 ‘하느님이 알고 있다’는 식의 대사를 가져오고, 거기에 자기 생각은 일절 덧붙이지 않지만, 사실 이 화자의 ‘코멘트 없음’은 그 자체로 그의 적극적인 의사 표명이다. 앞서 사실과 사실 아닌 것을 엄격하게 구분했던 것과 달리 그가 엄마의 믿을 수 없는 말에 대해서는 침묵하기 때문에, 도리어 이 말에 진실인 듯한 권위가 부여되는 것이다.




“희지는 목양견 미주를 부르고

목양견 미주는 양들을 이끌고 목장으로 돌아간다




(···) 이것이 희지의 세계다




희지는 혼자 산다”

황인찬, 「희지의 세계」




 물론 황인찬은 진술의 강제성이 ‘윤리적 실천’을 위해 요구되는 강한 힘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는 공격적인 어조를 띠는 황병승의 화자와 달리 지나치게 섬세할 만큼 말을 골라내는 화자를 내세우고, 진술의 강제성을 통해 말의 ‘힘’에 요구되는 ‘책임’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양들과 ‘함께 사는’ 희지의 세계를 그린 위 시에서는 희지가 ‘혼자 산다’는 말이 어엿이 살아있던 양들과 목양견 미주를 비롯한 ‘인간 아닌 것’들을 죽음의 자리에 강제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식이다.




 이러한 섬세한 ‘쓰기’는 당연히 섬세한 ‘읽기’를 요구하고, 그래서 작가와 독자 둘 다 전체보다는 부분에 몰두하게 된다. 물론 황인찬이 나무를 가꾸느라 숲을 돌보지 못하는 작가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전체로서의 작가가 전체로서의 시를 운용하는 방식에 따라 독자가 전체를 조망하는 시야와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시인들은 너무 많이 알고, 너무 섬세하고, 윤리적인 실천에 너무 몰두하느라, 전체를 ‘고체’처럼 면을 가진 무엇으로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액체처럼 유동하는 전체를 단속적으로 확인하고 환기하는 방식에만 익숙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현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보편적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버리는’ 일이 보편적이 된 상황에서 주도권은 사물에 놓인다(···) 사람들이 곧 사물을 따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안정한 사물들을 정체성의 원재료로 고의적으로 사용하는 세계에서, 정체성은 불안정한 것이 될 수밖에 없고(···) 전 생애를 하나의 길게 연장된 쇼핑 연회로 대할 자유는 이 세상을 소비상품으로 넘쳐나는 창고로 간주함을 의미한다(···) 그 내부에서의 차이는 위협적이지 않게 된 차이들이다. 위험한 요소들은 길들여지고 소독되고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로서의 작가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으로 ‘도피’해 있는 동안, 그 전체를 채우는 것은 죽음이라는 가면을 쓴 ‘가면무도회’로서의 한국 문학일 것이다. 한국 문학이 ‘동호회’ 같은 것으로 정체화되는 사태가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2005년의 이장욱은 진단했다지만, 작가라는 전체를 대체하는 동호회로서의 전체는 그 많은 작품들 사이의 어떤 중요한 차이도 무효화시키고 말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전체로서의 나를 은폐하는 기술에 능한 우리 시대의 시인들에게, 네가 너를 감추기로 한 너의 선택 때문에 한국 문학이 동호회 꼴이 나버렸다고 탓해버리면 그만인 걸까? 그니까 너의 은폐(와 동시에 강화)는 온전히 너의 선택이고, 너의 책임이며, 그래서 너의 잘못이다, 라는 판결을 내리면 쉽게 끝나버리는 문제일까? 물론 사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가령, 피에르 부르디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우리 시대의 남녀를 특징짓는 냉소주의를 개탄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냉소주의가 그것을 부추기고 요청하는 사회 경제적 상황과 연관이 있음을 놓치면 안 된다.”5 또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로마에 불이 났는데 불을 끌 방법이 없을 때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일이 다른 것을 하는 것보다 딱히 더 바보짓도 아니고 시의적절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5 피에르 부르디외, 「오늘날 불안정성은 도처에 있다」(『액체 현대』에서 재인용)




 이쯤에서 읽어보는 윤재성의 「만년의 작업」은 「희지의 세계」에 대한 각주이자 그의 비평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니까 황인찬의 ‘메타-진술’이라는 전략을 윤재성은 똑같이 그의 시에 대한 ‘메타-진술’로 되받아친다. 윤재성은 ‘두희는 알고 있다’는 애매모호한 확신만을 던지는 황인찬을 보면서, 그리고 자기를 은폐함으로써 강화하는 동시대의 시인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진술을 남긴다.




“내가 아는 제목을 화자가 말해주지 않은 이유가

이상하다”





 우리는 이 진술을 독백이 아닌 대화의 양식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의 진술은 대화의 상대를 지목하고 있으며, 마치 M.C. 에셔의 그림과도 같은 ‘메타-진술의 얽힘’을 통해 ‘나의 고립’을 타파하는 동시에 ‘전체로서의나’를 ‘전체로서의 너’와 동기화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와 너는 만연한 「만년의 작업」을 넘어서 죽음과의 거리를 넓히고, 다시 굳건하게 살아있을 필요가 있다. 고체처럼, 너와 내가 가진 면을 드러내 보이면서, 전체로서의 나와 너를 우리의 손으로 다시금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4. 반성(反省)과 반성(半醒)




“그때 나는 내가 죽어도 아무도 모를 거라고 확신했다”

유진목, 「작가의 탄생」





 살아있음을 죽음으로 위장하는 시는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명백히 죽은 것도 뻔뻔히 살아있다고 뻥 치는 시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인용한 유진목의 진술은 그런 점에서 명백한 차이를 드러내며, 박력 있게 다가온다. 그의 확신대로 정말 그가 죽었다 해도 독자로서 우리는 그의 죽음을 모르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은 문학 작품이 잉태하는 ‘불멸적 삶’에 대한 믿음이요 문화라는 것이 약속하는 ‘영원성’의 파생물일 것이다. 문화의 힘을 믿는 자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이미 실제적인 죽음을 꺾는 어떤 힘에 관하여 알고 있을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문화는 ‘반성’을 통해서 자신을 갱신한다. 물론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우리가 함께 반성함으로써 문화가 갱신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실히 반성은 죽음이라는 관념과 관련된다. 문화는 죽음과 탄생을 반복하는 흐름 속에서 그것의 활력을 드러낸다. 문화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집단의 반성을 부추기고, 집단의 반성이 문화의 한 생애주기를 끝내고, 집단이라는 힘이 또 다른 생애주기를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물론 ‘비판적 사고’이다. 비판 없이는 반성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양한 층위에서 여러 방향으로 엇갈린 비판의 작대기들이 어떤 전망을 가리켰는가? 결과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차이들을 더 성찰하고 응시해야 한다’는 식의 뻔한 당위만 반복된 것이 아닌가? (···) 오해의 여지를 무릅쓰고 이렇게 말하겠다. 우리는 가능한 한 그러한 차이들에 무관심해져야 한다고. (···) 간단히 말해서, 나는 비판이 사용하는 설명의 구조와 매우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배움의 이야기 구조를 제안하고 싶다. (···) 배움은 위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아래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오직 가로지름과 연결의 실천 속에서만 오기 때문에 배움은 장르나 장들, 영역들의 위계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 해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배움은 자신의 실천 속에서 그러한 위계와 분리를 해체한다. (···) 단지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운동이 있을 따름이다.”

이희우,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





 이희우는 인용한 글에서 ‘비판’에 대한 과도한 집념과 강박이 ‘비판에 대한 비판’의 연쇄적 흐름을 만들어내는 사태 속에서 ‘배움’이라는 대안적 도구이자 목적을 꺼내온다. 배움이 비판보다 더 나은 점이 있다면, 무엇보다 그것의 ‘이야기 구조’라고 그는 주장한다. 나는 그가 제안하는 이야기 구조가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앞서 소개한 윤재성의 「만년의 작업」이라는 시에서 ‘배움의 이야기 구조’ 같은 것을 발견한다. 윤재성은 ‘화자’라는 인물과 ‘나’라는 인물을 분리함으로써, 화자가 알고 있는 것과 그로부터 내가 알게 된 것(배움)의 구조를 제시함으로써, 그러한 앎으로부터 단순한 ‘비판’을 넘어서는 어떤 대화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희우의 설명대로 윤재성과 황인찬이 만들어낸 그들 각자의 세계 사이에는 어떠한 위계도 설정되지 않으며, 단지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운동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윤재성이 전체로서의 황인찬과 전체로서의 다른 시인들을 만나고자 노력했(그들의 시를 열심히 읽었)기 때문에 배움의 관계와 운동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이희우의 제안과는 달리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려는, 그저 반성에 반성을 중얼거리려는 시인이 있다. 또한 그는 윤재성의 방식과 달리 너희들과 대화를 나눌 수도 없다고, 그저 혼자 중얼거리겠다고 말하는 것 같다. 심지어 그는 ‘반성’이라는 제목의 연작시를 130편이나 써냈으면서도 그리 반성하지 않는 것 같은 독백으로 130편을 채운다. 그러한 그의 태도를 잘 요약하는 한 문장이 다음일 것이다.




“나는 딸딸이에 도가 튼 놈이요”

김영승, 「반성 699」





 그의 시는 ‘반성’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어놓고서는 ‘반성 없는 전체’에 대해서 그저 빈정거리기 일쑤이다. 그의 ‘반성’ 연작은 자기-동일적 반성의 시학이 되는 대신에, 반성의 역설을 비추는 자기-분열적 초상의 시학을 이룬다. 그의 시집 『반성』은 불연속적 연작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시의 번호를 무분별하게 배치하고 시들간의 서술적 인과관계를 부인하고 해체함으로써, 일관적이고 질서정연한 전체의 조망을 거부하며, 파편들의 인상을 통해 전체를 환기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6 이때 그가 환기하는 ‘반성 없는 전체’란 세계를 배제한 ‘전체로서의 나’와 나를 배제한 ‘전체로서의 세계’가 겹친 이중체이다. 말하자면, 그의 「반성」 연작은 세계를 배제한 나의 추하고 쓸쓸한 ‘딸딸이’인 동시에 나를 배제한 세계에 대한 뜨거운 ‘복수극’이기도 하다.




6 한준성, 「 김영승 연작시의 불연속성 연구 - ‘반성’ 시편을 중심으로」




 그가 시집 『반성』을 묶은 1980년대는 뜨거운 시대였다. 뜨거웠다는 것은 물론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랬다는 뜻이다. 하지만 『반성』의 뜨거움은 그 대상이 다르다. 그는 특정한 권력 집단을 이념을 적으로 삼는 게 아니라, 자신을 배제한 세계 전체를 적으로 삼아 그 뜨거움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어떤 것도 그의 차가운 비웃음을 면치 못한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그의 뜨거운 가슴과 달리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잡아주지 못한다. 이러한 시적 주체의 ‘고립’과 ‘소외’는 이수명과 박상순으로 대표되는 90년대의 개인들이나 장정일과 기형도의 도회적 자아와는 그 양상이 다른데, 그의 소외는 분명 타의적인 만큼이나 자의적인 성격 또한 띠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내 빤스를 입고 갔다. 나는 아내 빤스를 입어 본 적이 없다.

아내는 내 빤스를 입고 가 버린 것이다. 나는 빤스가 없다. 일주일 후에 아내는 내 빤스를 빨아서 갖고 왔다.

나는 빤스를 입었다.”

김영승, 「반성 79」





“예비군 편성 및 훈련 기피자 자수기간이라고 쓴

자막이 화면에 나온다

나는 훈련을 기피한 적이 없는데도

괜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고

어제나 그저께의 일들을 생각해본다

나 같은 놈을 예비해 두어서 무얼 하겠다고

어김없이 예비군 통지서는 또 날아오는가

후줄그레한 개구리옷을 입고

연탄불이나 갈고 있는 나같은 놈을

나는 문득 자수하고 싶다

뭔가를 자수하고 싶다”

김영승, 「반성 83」





 사실 ‘소외’라고 하기에는 좀 과장에 불과한 듯한,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들도 그의 ‘반성’ 속에서는 주체의 고독과 불안 또는 공허를 드러내는 전체가 되어있다. 때로는 아내가 실수로 내 빤스를 입고 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일상에서는 그러한 해프닝이 어떤 의도나 의미와는 무관하게 충분히 생길 수 있는 노릇이다. 내 빤스를 입고 간 아내의 행위에는 어떤 이성적 숙고나 고뇌도 없었을 것이며, 그러한 해프닝이 둘의 관계에 결정적인 사건이 됐을리도 만무하다. 그러나 ‘반성’이라는 제목이 풍기는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고뇌의 아우라가, 또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은 채 그런 아내의 착오를 받아들이기만 하는 화자의 쓸쓸하고 나지막한 진술이 이 이야기를 ‘의미심장한 전체’로 각인시킨다. 즉 의미를 생산하는 ‘전체로서의 나’와 ‘전체로서의 세계’는 그 경계가 없다.




 기승전결이 부재한, 한낱 에피소드에 불과했던 이 시시하고 지리멸렬한 일화들이 김영승의 시적 양식 속에서는 ‘전체로서의 이야기’(알레고리)를 이루게 된다. 나로부터 세계를 배제한 동시에 세계로부터 나를 배제한 이 ‘이중적 소외’가 도리어 ‘전체로서의 나-세계’를 중첩함으로써, 나와 세계를 둘 중 어느 하나가 우선하거나 위계에 놓이지 않는 하나의 필연적인 쌍으로 묶어버리고 있다. 이때 불연속적 인식을 통해서 조망할 수 없는 전체를 환기하는 그의 작법은 미적으로 현대적이지만, 말의 질서와 사물의 질서를 구별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언어관은 동시에 반(反)현대적인 인식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반성 83」의 예비군 통지서는 그 뒤의 이데올로기를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념적 대상으로서의 국가(확실성의 세계)를 표상하지 않는다. 편지는 거기에 적힌 내용과 상관없이 베일에 가려진 절대적 세계(불확실성의 세계)가 나에게 보내온 직접적 메시지, 직접적 응시이며, 그 절대적 시선 앞에서 나는 자수할 것이 없는데도 ‘자수의 형식’으로 무언가를 진술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이때 그가 느끼는 편지 한 통의 위력은 국가의 크기보다도 훨씬 크고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적 세계의 불확실성은 국가라는 ‘상대적 현실’의 확실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집을 나서는 데 옆집 새댁이 또 층계를 쓸고 있다.

다음엔 꼭 제가 한 번 쓸겠습니다.

괜찮아요, 집에 있는 사람이 쓸어야지요.

그럼 난 집에 없는 사람인가?

나는 늘 집에만 쳐박혀 있는 실업잔데

나는 문득 집에조차 없는 사람 같다.

나는 없어져 버렸다.”

김영승, 「반성 99」




 이것이 「반성 99」의 전문이지만, 나는 끝에 문장 하나를 추가하고 싶다. 앞서 인용한 유진목의 문장을 꺼내온다. “그때 나는 내가 죽어도 아무도 모를 거라고 확신했다” 과연 그렇다. 집에조차 없는 사람이 되어 새댁과 담소를 나눈 김영승의 ‘나’는 없어져도 자신의 부재를 알릴 수 없는 존재, 죽어도 자신의 죽음을 알릴 수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이 ‘나의 없어짐’이라는 사태는 진술의 강제성을 은폐하고 강화함으로써 메타-진술을 시도하는 우리 시대의 화자들이 보여주는 사태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그들의 화자가 죽음을 가장함으로써 삶이라는 것의 현전을 지연시키고 있다면, 김영승의 시적 주체에게는 죽음을 가장하는 일조차 불허된다. 그의 시에서는 반대로 죽음이란 사태가 무한히 지연되며, 남는 것은 ‘삶의 현전’뿐이다.




 반성(反省)에 대한 글을 쓰려고 사전에 반성을 검색하다가 반성(半醒)이라는 단어를 만나버렸다. 이 생소한 단어는 (술이나 졸음 따위에)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깨어있는 상태를 뜻한다고 한다. 어쩌면 이러한 반성(半醒)의 상태야말로 ‘전체로서의 나’와 ‘전체로서의 세계’가 중첩됨으로써, 나의 생생한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최적의 컨디션이 아닐까? 다시 잘 수도, 잠을 깰 수도 없는, 그 사이의 어중간한 상태 말이다.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김영승, 「반성 16」




 전체를 상정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반성도 근본적인 반성일 수 없다. 전체를 상정하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반성은 이성의 죽음을 가장하는 이성의 회피일 뿐이다. 그러한 반성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삶의 무한한 지연에 불과하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삶이 있기 전에 죽음이 있는 게 아니고 죽음이 있기 전에 삶이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반성하기 전에 먼저 요구되는 자세는 생생히 살아 있는 전체를 바라보려는 태도와 의지일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내가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라.”

드니 디드로,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





 18세기의 디드로는 소설 속에서 화자와 독자의 대화를 너무 당연하게(일방적으로) 상정하는 한편, 자신의 진실을 진술할 수 없다는 독자의 한계를 저당 잡아 이야기를 계속해나간다. 독자를 당당히 밟고 가는 힘은 작가의 이야기에 대한 의지요 이야기에 대한 의지는 작가의 전체를 조망하고자 하는 시선이다. 이야기에 대한 그의 의지와 당당한 자세는 너무나도 굳건해서, 독자가 진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잠깐 잊어버릴 정도이다. “아무리 자크가 선량하고 또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크다 할지라도, 난 자크가 마음 깊숙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고 싶다(···) 독자 그대가 직접 내게 말해주기를 바란다.”




 다시 한번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읽어본다. 사실 이 시의 화자도 “독자 그대가 직접 내게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시에서 화자는 당신을 얼마든지 ‘말없이’ 보내드리겠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 말은 나 보기가 정말 역겹냐는 물음이고, 이는 곧 당신의 대답에 대한 요청이다.7 당신은 김소월의 화자가 정말 역겨워 보이는가? 혹은 역설적으로 아름다워 보이는가? 독자는 그의 말을 어렵게 해석할 게 아니라 이 물음에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너를 떠나보내려면 내가 너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진달래꽃」은 이별이나 사랑을 노래하는 시라기보다는 (이별과 사랑의 전제 조건이 되는) ‘만남’을, 나와의 만남을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하는 시인 것이다. 우리는 (「진달래꽃」을 달달 암송할 수도 있을 지경이지만) 과연 그 화자를 제대로 만나본 적은 있었는가? 우리는 여태 죽음의 향기만이 가득한 꽃길 위에 서서 네가 오는 것도 모른 채 애꿎은 꽃 타령만 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7 윤효녕,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이별 수용의 시가 아니다」





글. 김유수
시도 쓰는 사람.
2024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으나 주 무대는 블로그인 인터넷 망령이다. 
비평도 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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